세상만사/세상만사 窓

스님과 마나님

sungsub song 2019. 6. 17. 12:22

스님과 마나님


박문수가 어느날 산길을 가고 있었는데, 저 앞에 사대부집 마나님이 몸종도 없이

홀로 걸어 가고 있었고, 조금 뒤떨어진 거리에서 스님한 사람이 길을 가고 있었다.


얼마쯤 가다 보니까 저만큼 잔디밭 위에서 마나님과 오십세 가량 되어 보이는 

스님이 말다툼을 하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하여 나무 뒤에 숨어서 조용히 하회를 기다려 보았다.

그런데 그 때 스님이 이렇게 말했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 이 산중에서 한 번쯤 통정을 함이 어떨런지요?"하고 

해괴한 요구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 마나님은 당당한 위엄을 보이며 스님을 꾸짖는 데,

"석존의 십계(十戒) 중에 불사음계(不邪淫戒)"라는 대목이 뚜렷하게 나와 있거늘 

대사께서는 어찌하여 일시적인 사념(邪念)으로 파계(破戒)를 하려고 하시나이까?

"만물(萬物)은 인연의 소생이라고 하오. 우리가 깊은 산중에서 단둘이 만난 것은 전생(前生)

부터  인연일것이오. 그대는 전생의 인연을 부디 거절 마시고 나의 부탁을 들어주시오."

"대사는 무슨 당치도 않는 말씀을 하고 계시오.

반야경에 색즉시공(色卽是空)이오, 공즉시색(空卽是色)이라는 말씀도 있사온데,

눈에 보이는 만물은 허깨비에 불과 하단 말씀도 모르시오?"

말로서는 도저히 이길 수 없게 되자, 스님은 엉뚱한 제안을 하게 된다.

"내가 이제부터 1.2.3.4.5.6.7.8.9.10.의 순서대로 그대에게 요구할 것이니,

내말이 끝남과 동시에 꼭 같이 응대를 해야만 하오.

만약 그렇지 못할 시에는 내가 당신을 범하도록 하겠소."

중놈의 요구가 부당하기 이를데 없는 것이었다.

박문수는 지켜보다가 정말로 중놈이 마나님을 범할려고 하면 그때 나서리라.

생각 하고 있었다.

그러자 마나님은

"좋소이다. 그러면 대사가 시작해 보시오. 내가 대(對)를 하겠소이다."

지켜보는 박문수는 가슴이 철렁하였다.

신이난 중놈은 이제 되었다 싶은지. 크게 기뻐하며 즉석에서 

다음과 같이 씨부려 대는 것이었다.

일. 일룡사(一龍寺)에 있는 중이

이. 이룡사(二龍寺) 가는 길에

삼. 삼로(三路) 거리에서

사. 사대부인을 만났으니

오. 오음이 불통하여

육. 육효로 점을 치니

칠. 칠괘도 좋다마는

팔. 팔괘는 더욱 좋다.

구. 구부려라.

십. 씹 좀 하자.

중놈의 아가리에서 나온 말치고 해괴한 음담패설이었다.

박문수는 마나님이 걱정되었다.

중놈은 기고만장하여 저 여인을 곧 품에 안을 수 있게 되었다고 기뻐하였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마나님은 자세를 똑바로 하여

중놈을 쏘아보며 벼락같은 호통을 치는 것이었다.

"이 천하에 잡놈아!

내가 다시 한 번 훈계를 내릴 테니 중놈은 내 말을 똑똑히 듣거라."

일. 일편단심(一片丹心) 이 내 마음

이. 이심(二心)이 있을 소냐?

삼.'삼강이 뚜렷하고

사. 사리가 분명커늘

오. 오할할 이 잡놈아.

육. 육환장 짚고 서서

칠. 칠가사 둘러매고

팔. 팔도를 편답하며.

구. 구하는 게

십. 씹이 더냐?

마나님의 호통은 추상같이 준엄하였다.

마나님은 지금까지 "대사님" "대사님"하고 존경을 해왔는 데,

이제는 중놈의 소행이 괘씸하여 "잡놈"이라고 호령하니


그 위세가 얼마나 당당하고 무서웠던지, 중놈은 혼비 백산하여

'예끼, 천하에 무서운 계집이로 구나! 하고 

그대로 줄행랑 치는것이었다.

중놈이 도망 가 버리자,

마나님은 아무일 없었던 것처럼 산길을 다시 조용히 걸어갔다.


참으로 존경할만한 부인이기에 박문수는 먼 빛으로나마 

몇 번이고 머리 숙여 탄복을 했다.

 -고전해학 중에서-


   무명속의 등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