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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사 대성당

sungsub song 2019. 1. 14. 10:42
피사 대성당, 피사의 사탑 (이탈리아 피사)
유럽(남유럽,이탈리아,로마)

피사 두오모 광장


중세 시대에 대성당과 종탑, 세례당, 무덤을 지으면서 탄생한 피사의 ‘기적의 광장’은 나중에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물리학상 중요한 발견을 한 장소이다. ‘피사의 사탑’이라는 종탑에서 이루어진 실험에는 중력의 법칙을, 대성당에 매달린 등불의 움직임에서는 진자의 법칙을 발견한 것이다. 일찍이 지중해에 이름을 떨친 해군 도시 피사는 과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라는 영광으로 빛난다

 

 피사 대성당


팔레르모 해전에서 얻은 풍부한 전리품을 바탕으로, 1063년에 달마티아 출신의 건축가 부스케토의 지휘 아래 새로운 대성당을 짓기 시작했다. 평면은 라틴 십자가 모양이며, 교차부에 둥근 천장을 씌우는 것이었다. 라이날도가 그 뒤를 이어 1118년에 롬바르디아풍의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었다. 오랑식 건물의 내부 장식은 아랍의 영향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파사드는 회색이나 검은 색이 섞인 하얀 대리석이며, 마름모꼴 패널 장식 따위로 웅장하고 화려하게 꾸몄다. 정문 3개는 원주로 구별했고, 위에는 개구부가 없는 아치가 연이어 있다. 정문 위쪽은 오더(원주와 그 상부 수평 부분의 조합)와 아치로 꾸민 4층 로지아(한쪽에 벽이 없는 특수한 방)로 구성했는데, 이런 아치 구조는 파사드 전체에 우아하고 아름다운 움직임을 부여하였다. 

 

전체적으로 균형 잡힌 아름다운 이 건물은 나중에 토스카나 지방의 성당 건축의 본보기가 되었다. 신랑에 있는 설교단은 조반니 피사노가 1302~1311년에 만든 것으로, [구약성서]의 여러 장면과 [신약성서]의 최후의 심판 장면을 새겨 놓았다. 대성당 안에 새워 놓은 원주 68개 가운데 상당수는 피사의 선단 원정을 통해 얻은 전리품을 다시 이용한 것이다.  후진의 둥근 천장 모자이크에는 처마부에 작품인 [복음서 기자 요한]이 있고, 사제관의 그림들은 안드레아 델 사르토와 소도마의 작품이다. 지금 입구로 쓰이는 청동문은 17세기 초의 작품이다.  신랑 천장에는 ‘갈릴레이 램프’라는 커다란 등이 걸려 있다. 갈릴레이는 이 등의 흔들림에서 힌트를 얻어 나중에 진자의 법칙을 발견했다고 전해지는데, 지금 있는 ‘갈릴레이 램프’는 그 때의 것이 아니다

 

피사 세례당, 성당, 사탑 전경    출처 블로그 > 프라하의 봄

 

피사 대성당

 

피사 대성당과 피사의 사탑

 

세례당


대성당을 마주보고 있는 둥근 세례당은 음향 효과가 뛰어나기로 정평이 나 있다. 1153년부터 설치 운영한 것으로, 바깥벽 전체를 대리석 콜로네이드로 꾸미고 둥근 천장을 얹었다. 그 뒤 1246년에 코모 출신인 비가렛리가 대리석으로 세례반을 만들었다. 또한 니콜라 피사노가 1260년에 완성한 대리석 설교단의 부조 [수태고지, 예수 탄생 및 목동들]은 르네상스의 선구적인 작품이다.  ‘기적의 광장’ 북쪽 끝에는 칼리타 의료원, 대주교관과 더불어 네모꼴 무덤이 로마 시대에 쌓은 성벽에 붙어 있다. 이것은 1278년의 십자군 원정 때 조반니 디 시모네가 기공한 것으로, 안뜰을 에워싼 회랑 형식으로 이루어진 15세기 고딕 양식으로 지었다.

 

회랑 형식의 갤러리는 창의 트레이서리(고딕식 창의 장식 격자)와 반원형 아치로 이루어졌으며, 벽은 프레스코화로 장식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4년 7월 27일에 폭격으로 벽화가 불타 버려, 베노초 고촐리 작품과 페스트에 대한 공포를 생생하게 살린 [죽음의 승리] 등만 남아 있다. ‘기적의 광장’은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관찰하고 실험한 대성당과 종탑이 있는 곳으로, 갈릴레이의 실험은 피사를 과학의 거리로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피사는 1284년 경쟁 도시인 제노바에 패한 다음부터 쇠퇴하기 시작하여 1406년에는 피렌체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세례당의 설교단


니콜라 피사노의 작품이다. 육각형 설교단을 대리석 원주 7개가 떠받치고 있다. 부조는 비잔틴과 로마네스크 양식을 융합시킴으로써 르네상스를 예고하고 있다

 

납골당


두오모 북쪽의 대리석의 높은 벽으로 둘러싸인 건물로 고딕 양식으로 되어 있는 회랑은 14~15세기 때의 프레스코 화가 그려져 있다. 납골당은 내부의 회랑으로 둘러싸인 정원이 아름답다. 또 프레스코화 '죽음의 개선(Master of the Triumph of Death)'도 많이 알려져 있다

 


납골당안에 있는 프레스코화로 세계 제 2차 대전때 폭격으로 완전하지 못하다

 

피사의 사탑    출처 블로그 > 프라하의 봄

 

피사의 사탑     


16세기 말에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피사의 사탑’에서 작은 실험이 이루어졌다. 그것은 너무나 하찮은 실험으로 보였고, 사람들의 조롱을 받았다. 그러나 나중에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설을 뒤엎은 중력의 법칙을 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무게가 다른 돌덩어리 2개를 294단의 계단 위로 끌어올려, 사탑의 꼭대기에서 아래로 떨어뜨리자, 2개가 동시에 땅에 떨어졌다. 물체의 낙하 속도는 개개의 질량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지구의 중력에 의해 결정된다는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이론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피사 출신인 갈릴레이는 실험하기에 아주 적당한 건축물이 가까이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피사의 사탑은 1173년에 건축가 기욤과 피사 출신 본난노 피사노가 착공했다. 그런데 공사가 3층까지 진척되었을 때, 퇴적층 부분의 지반이 내려앉아 탑이 북쪽 방향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그래서 공사를 중단한 뒤, 조반니 디 시모네가 이번에는 남쪽으로 기울어지도록 경사를 계속 수정하면서 완성했다. 종을 매달아 놓은 맨꼭대기 층은 14세기 중반 무렵에 토마소 데 피사노가 지었다. 원통형 바깥 둘레의 지름이 17m, 전체 무게는 14000t이 넘는다. 세월이 흐르면서 기울기는 점점 심해졌고, 이 기울기를 이용해서 갈릴레이가 실험을 한 것이다.

 

피사의 사탑은 원래 높이 100m 이상으로 세울 계획이었지만, 결국 55m에서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세례당, 무덤(캄포산토)과 더불어 대성당(두오모)에 딸린 아름다운 실루엣을 보여주는 8층 사탑은 옛날 상업 도시 피사에 있는 ‘기적의 광장’을 더욱 개성 있게 만들어 준다. 피사는 리구리아 해로 흘러드는 아르노 강변에 들어선 항구 도시로, 로마 시대에는 유리우스오브 제쿠엔스라고 부른 중요한 해군 기지였다. 11세기에는 상업과 항해 규정을 정해 그리스에서 콘스탄티노플, 이집트, 지중해 동해안 일대에 이르는 상업로의 기반을 확립했다. 그리고 11세기 중반쯤에 사라센족과 싸운 팔레르모 해전에서 승리를 거두어 지중해 대부분을 지배하게 되었다. 피사 곳곳에서는 무엇보다도 산성비로 인한 건물의 피해가 눈에 띈다. 하얀 대리석은 거무스름해지고, 관광객의 낙서도 끊이지 않는다.

 

예전에는 축구팀을 응원하는 열렬한 팬이 300m나 떨어진 사탑 맨꼭대기에 올라가 관전한 적도 있다. 사탑 벽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하자 1990년에 사탑을 폐쇄했다. ‘기적의 광장’에 있는 피사의 사탑은 1173년에 착고한 직후 지반 침하가 일어나 처음에는 북쪽으로, 나중에는 남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1838년에는 기울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토대 보강 공사를 시작했다. 근래에는 전문가들이 이 사탑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1956년 경사가 4m를 넘으면서(약 8°의 경사) 위기를 알리는 경고가 발동되었다. 1993년에 전문가 그룹의 제안에 따라 토대를 납으로, 맨 아래층을 강철 케이블로 보강했다. 지하수의 흐름이 바뀜으로써 일어난 기울기에 일단 쐐기를 박은 것이다. 탑을 해체한 다음 근본적으로 토대를 개선하고, 가공석을 새로 쌓아 올려 튼튼한 탑을 새로 짓자는 계획도 제시되었지만, 반대 의견이 워낙 많았다. 그래서 사탑 그대로 보존할 방법을 찾고 있다. 피사의 사탑은 2001년 6월 16일, 11년간의 보수공사를 마치고 일반에 다시 공개되었고 2001년 12월 15일부터 관광객 출입이 허용됐다

 

피사의 사탑

 


사탑은 원통형 종탑으로, 8층 구조인 탑 안쪽은 지름이 7.7m인 빈 구멍으로 되어 있다. 맨 위층에는 종을 매달아 놓았으며, 각 층에는 원주로 콜로네이드 회랑을 에워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