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음악과 글방

수덕사의 여승에 얽힌 일화

sungsub song 2022. 8. 30. 17:22



수덕사의 여승에 얽힌 일화



인적없는 수덕사에 밤은 깊은데

흐느끼는 여승의 외로운 그림자

속세에 두고 온 님 잊을 길 없어

법당에 촛불 켜고 홀로 울적에

아~ 아~ 수덕사의 쇠북이 운다


60년대 중반 발표되어 꽤나 힛트한 대표적 대중가요다.

속세에 두고 온 애절한 사연을 잊지 못해 흐느끼는
비구니가 그려지는 조금은 단조로운 가사 내용이다.


그런데, 당대의 사람들은 이 애절한 비구니의 사연을
어떻게 받아들였기에 그처럼 큰 반향을 일으키며 히트할 수 있었을까?

그런 애절한 사연이 있을법한 수덕사 여승의 실제 모델은 있었을까?
있었다면 그는 누구일까?

이야기는 암울했던 일제 강점기 때, 시대를 앞서간 신여성 세분이 있었으니,

우리나라 최초의 대중가요로 불리는 “사의 찬미”로
너무나 유명한 윤심덕이 그 한 명이요,

또한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화가이며 문장가인 나혜석이 그 한 명이고,

나머지 한 명은 시인으로 유명한 김일엽이다.


이 신여성 세 사람은 조선사회 남존여비의 실체가
그대로 존재했던 시기에 시대의 요구를 단호히 거부하고
불꽃처럼 살며 사랑을 위해 목숨을 건 여인들이다.


나혜석은 사랑에 버림 받고, 윤심덕은 현해탄에서 사랑과 함께 했으며,
김일엽은 스스로 사랑을 버린 여자다.

윤심덕과 나혜석의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더 하기로 하고
여기선 실제로 수덕사의 여승이었으며 한국 비구니계의
거목으로 추앙 받는 김일엽의 이야기를 해보자.

김일엽의 본명은 “김원주”다.

일엽(一葉) 이란 필명은 춘원 이광수가
그녀의 아름다운 필체에 반해 지어준 이름이다.

그런 사연 때문인지 둘 사이의 스캔들이 장안의 화제가 되기도 했으며
연애대장 이라는 별명을 들을 정도로 자유 분망하게 살아갔으며
진취적인 자신의 삶을 여성운동으로 승화시켜 “자유연애론”과
“신 정조론”을 주장하게 된다.


그녀가 80몇 년 전에 주장했던 신 정조론을 살펴보자.

“남녀가 서로 사랑을 나누었다는 것이 문제될 것은 없다.
정신적으로, 남성이라는 그림자가 완전히 사라져버린
여인이라면 언제나 처녀로 재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여인을 인정할 수 있는 남자라야 새 생활을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여인, 그것이 바로 나다.”

한마디로, 남녀가 나누는 육체적 사랑을 순결
또는 정조로 표현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이야기다.

당시 꽤 파격적인 주장으로 받아 들여졌지만 작금의 세태에
비추어 보더라도 앞서가는 신세대의 사고방식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 모든 여성들이 그러했듯이 그녀도 극심했던 남존여비 라는
잘못된 인습의 피해자 일 수밖에 없는 현실을 몸소 겪었다.

부모의 중매로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남자와 결혼하는데
남자가 의족을 한 장애인이었다.

남자가 이 사실을 숨겼으므로 지금이라면 사기 결혼을 당한 셈이다.

신뢰에 기반하지 못한 결혼생활은 일찌감치 청산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그녀의 생활은 더 더욱 자유분망하고 사랑하며 살아가게 된다.


김일엽은 한국 최초 여자 유학생으로 일본으로 유학하게 되는데
여기서 또 일본인 “오다 세이조”와 운명적 사랑을 하게 된다.

오다 세이조는 아버지를 은행총재로 둔 일본최고 명문가의 아들이며
당시 규수 제국 대학생이었다.

남자 부모님의 반대로 결혼하지 못하고 헤어지는 아픔을 겪는데,
이때 둘 사이에 아들이 하나 태어난다.


이 아들은 아버지 친구의 양자로 입적되어 자라나게 되며
이 사람이 한국과 일본에서 인정받는 유명한 동양화가
일당스님이며 이름이 “김태신”이다.

일당스님은 지금도 김천의 직지사에서 활동 중이며
해방직후 김일성의 초상화를 그렸는데
김일성 종합대학에 지금도 걸려있다고 한다.

당시 그 일로 해서 조총련계로 오해 받아 작품 활동에 고초를 겪기도 했다.

오다 세이조와의 사랑도 아픔으로 겪은 그녀는
곧 일본에서 돌아와 수덕사의 여승이 된다.

자신이 추구하는 사랑이 세파에 으스러지는 아픔을 이겨내고,
또 다른 참 인생의 행로를 불자의 길로 선택한 것이다.

어머니가 보고 싶어 어린 아들이 수덕사를 찾아 왔는데
불자가 되었으니,
“속세에 맺어진 너와 나의 모자 인연은 속세에서 끝났으므로
더 이상 나를 어머니라 부르지 말라” 하며 모질게도 모자의
정을 끊고자 이역만리 찾아온 어린자식을 절 밖에서 재웠다 한다.


이때 김일엽의 절친한 친구인 나혜석이 수덕사 밖에 있는
수덕여관에서 같이 지내며 어머니처럼 자신의 젖가슴도
만져보게 하고 그림도 가르쳤다고 한다.

그때 흘리지 못한 눈물이 가슴에 쌓여 해탈로 녹아내렸을까?


비구니로서 그의 인생이 한국 불교계에 큰 족적을
남길만큼 성공적인 것은 우연이 절대 아니다.

가수이자 음성포교사인 “수덕사의 여승”의 주인공 송춘희씨를
기념하기 위하여 절 앞에 있는 주차장에 노래 기념비를 세웠으나
2-3일후 수덕사의 스님들이 이 기념비를 무너뜨렸다고 한다.

그 연유는 아마도 노래의 가사 내용이 스님들의 비위에 맞지 않았나 싶다.

그렇다 해도 중생을 구제하고 아픔을 함께 해야하는
스님들께서 속세의 작은 정표 하나 가슴으로 안아주지 못하는
처사가 못내 아쉽기만 한 것은 내가 불자가 아니어서 그런걸까?

일엽스님께서 살아 계셨다면 기념비는 어찌 되었을지 자못 궁금하기만 하다.


무심히 부르고 흘러버릴 대중가요일 뿐인
“수덕사의 여승”에 이렇게 딴지를 걸어 보는건,
이 노래가 만들어진 시기가 60년대이니
이 때엔 일엽스님께서 수덕사에 살아 계실 때다.

단정할 수는 없으나 노랫말을 쓴 이가 일엽스님의
인생을 안다면 아마도 그런 가사가 나왔음직 하지 않은가.


이 글에 인용된 사실적 기록들은 일엽스님의 아들
일당스님(김태신)이 최근 발표한 자전소설
<어머니 당신이 그립습니다.> 에서 발췌

오늘도 당신은 좋은일만 있을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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